‘변화’의 바람 속에서 ‘회복’의 기쁨을 누리다
‘변화’의 바람 속에서 ‘회복’의 기쁨을 누리다
  • 박주영 기자
  • 승인 2019.12.13 1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변화’의 바람 속에서 ‘회복’의 기쁨을 누리다
 
                                                    박경희 (소설가)
 
 부끄러운 고백으로 글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해외 선교 연주 여행’이라는 말을 들을 때, ‘해외 선교’ 보다는 ‘연주 여행’ 에 관심을 뒀다. 즉, 바쁜 일상에서 잠시나마 ‘쉼’을 얻을 수 있는 여행을 꿈꾸었다는 말이다. 처음 동행했던 유럽 순회공연 때도 그랬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천 공항으로 가는 길은 운무로 뒤덮여 여행의 기분을 더했다. 공항에서 낯익은 장로님과 권사님들과 인사를 나누며, 처음 동행할 때와는 달리 가족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긴 세월 가랑비에 옷 젖듯 은밀히 쌓아 온 정은 따듯했다.

소설가 박경희


 호찌민 공항에 도착하니, 후텁지근한 날씨에 코트를 벗으며 타국에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에 올라 담당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때만 해도, 호텔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을 만큼 시간이 꽤 여유로울 줄 알았다.

그러나 호찌민 시내도 서울 못지않게 교통 체증이 심했다. 저녁에 있을 신학교 공연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할 듯싶었다.
 그때였다. 급하게 장로성가단 이철웅 지휘자가 제안을 내놓았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그 때 호텔에 들렸더라면, 시간에 쫓겨 은혜로운 찬양을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장로님들! 피곤하고 힘드셔도 곧바로 신학교로 가는 게 어떨까요. 그곳에서 단복 갈아입고 리허설 한 뒤, 찬양을 드렸으면 좋겠어요.”
 이 말에 인상을 찌푸리거나, 다른 의견을 내놓는 분은 없었다. 다만 ‘여행’ 이 목적이었던 나만 속으로 피곤해서 제대로 찬양이나 하실까? 란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호찌민 시내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한 <남부 베트남 신학교>에 도착하니, 어느새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단아한 건물의 신학교에 들어서니, 화단에 핀 예쁜 꽃들이 우리 일행을 환영해 주었다.

단복으로 갈아입은 장로님들이 무대 위에 서자, 넓은 강당이 꽉 찬 느낌이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남학생과 아오자이를 입은 여학생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그들의 눈 속에는 ‘우정의 나라 한국에서 온 찬양 선교단’을 향한 기대가 넘치는 듯싶었다. 사회주의 국가인 베트남에 300명이나 되는 신학생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여학생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더욱 놀랐다.
 늘 그렇듯, 해외 공연 때마다 어렵게 가져간 핸드벨 설치가 끝나자, 통역을 맡으신 이윤우 목사님의 오프닝 멘트가 울려 퍼졌다.


신학교 총장님의 환영사와 함께 ‘한국장로성가단’ 34년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단복을 입고 꼿꼿한 자세로 찬양을 하는 장로님들의 모습은 청년 그 자체였다. 강당에 울려 퍼지는 합창의 화음은,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퍼 올린 물처럼 깊은 맛이 났다. 또한 웅장했으며, 심오한 데다 낭랑하기조차 했다.
 나는 슬며시 신학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처럼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는 않지만, 분명 심취된 모습이었다. 어떤 여학생은 앞에 앉아, 한 곡도 놓치지 않고 녹음했다. 남학생들은 마치 하나님과 만난 듯, 넋을 놓고 들었다.
 동행한 권사님들은 곡이 끝날 때마다 ‘아멘’을 외치며, 손뼉 쳤다. 그때 통역을 맡으신 이윤우 목사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다.
 “베트남은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공연 중에 손뼉 치는 문화가 없습니다.”
그제야, 분명 감동받은 눈빛인데 전혀 손뼉을 치지 않는 신학생들의 반응이 이해되었다.
 ‘평화의 기도’ ‘주 너의 사람아’가 끝나고 핸드벨 연주가 시작되었다. ‘예수 나를 위하여’ ‘기뻐하며 경배하세’를 연주했다. 잠깐 박자를 놓친 장로님의 당황해하는 모습마저도 은혜였다. 절대 쉽지 않은 연주를 위해, 늦은 나이에 배우고 익힌 장로님들의 노고를 알기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신학생들은 핸드벨 공연을 처음 보는 듯,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어 중창단의 힘찬 공연으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다시 단 위에 선 장로님들의 합창이 이어지던 중, 처음 듣는 곡인데 매우 영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가 징계받음으로 그가 채찍 맞음으로
 그가 고통받으므로 내가 편히 사노라.
 (중간 생략)
 그가 고통받으므로 내가 편히 사노라.
 그가 징계받음으로 그가 채찍 맞음으로
 그가 고통받음으로 날 위해 못 박혔네. 주가
 
이 찬양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선교’ 보다는 ‘여행’을 먼저 생각했던 자신이 진실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찬양하는 장로님들의 얼굴을 살폈다.
 웅장한 목소리와는 달리 단 위에 선 분들은 열일곱 소년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에 젖은 듯, 해맑은 얼굴로 고백 송을 드렸다. 한국장로 성가단의 평균 연령이 70세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새벽에 공항까지 나오느라 분명 잠도 설쳤을 테고, 비행기 안에서 다섯 시간 동안 다리도 못 펴고 온 노장들이 맞나, 싶었다. 유럽 순회공연을 갔을 때, 느끼지 못한 ‘바람’이 내 가슴 속에서 일렁였다.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 일렁이는 바람은 ‘회복’이었다. 주님을 만났을 때의 희열과 사랑을 잊은 채, 관습적으로 살아가던 메마른 영혼에 내리는 단비였다. 주님의 인도하심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내가 은혜받은 만큼 신학생들도 분명 뜨거운 그 무엇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오자이를 입은 여학생은 양손을 모은 채, 찬양을 듣다 눈물을 흘렸다. 남학생은 무대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때 섬광처럼 그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개화기 시절, 목숨 걸고 우리 땅에 복음 전하러 오신 선교사님들의 모습이었다. 바로 장로성가단의 찬양이 베트남 신학생들에게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장로님들이 뿌린 찬양의 씨앗이 베트남 신학생들 가슴 속에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을 생각하니 뭉클했다.
 마지막 곡인 ‘이 믿음 더욱 굳세라’를 부를 때는, 조금 안타깝긴 했다. 베트남어로 된 자막이라도 준비했더라면, 언어는 달라도 함께 찬양을 드리면 더욱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노이 북부 신학교에서는 베트남어와 영어 자막이 떴다.)
 공연이 끝나자 밤이 깊었다. 학교 측에서 마련한 다과와 간식을 먹으며, 준비해 간 ‘성금’을 신학교 총장에게 전하는 시간이 있었다.
 찬양은 물론, 신학생들을 위한 1000불의 장학금까지 준비한 성가단의 배려와 믿음이 아름다웠다. 해외 찬양 선교 연주 또한 자비량으로 나서는 것이면서, 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까지 기부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알고 보니, 해외 선교 연주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건넨 성금 전부를 호찌민 남부 신학교와 하노이 북부 신학교에 장학금으로 전한 것이다.
 늦은 밤, 비로소 호텔에 짐을 풀며, 나눠 준 월남 반미 샌드위치로 요기를 했지만 뿌듯했다. 장로성가단의 역할과 에너지를 새로 발견한 기쁨이 컸던 첫날 공연이었다.

 

 이 감동은 호찌민에서 두 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간 하노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오전에는 ‘하노이 한인교회’에서 성가 찬양이 있었다. 멀리 타국까지 와 신앙 생활하던 성도들은, 장로성가단이 들어서자, 마치 고향에서 온 부모님을 만난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찬양 중 눈물을 흘리는 성도도 많았다. 이방인으로 살면서 느낀 외로움과 고단함이 몰려왔던 것 같다. 담임 목사님은 두 곡이나 더 불러 주길 요청할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덕분에  찬양을 더 많이 불러야 했던 장로님들이 대단해 보였다. 점심으로 닭칼국수를 준비해 주신 손길도 고마웠다.


 주일 예배 찬양 후, 곧바로 ‘하노이 북부 신학교’ 학생들을 위한 공연이 이어졌다. 장로님들의 우렁찬 찬양은 더욱 빛났고, 공연 후 장학금을 전달하는 과정 역시 은혜의 연속이었다. 하노이 북부 신학교 학생들은 남부보다는 훨씬 더 역동적이었다. 찬양이 끝난 후, 간간이 손뼉도 치고, 앙코르도 외쳤다.
 신학생들을 위한 조촐한 만찬 자리에서도 시종일관 환한 미소로 장로님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음식도 맛있게 먹으며, 교제를 나누는 모습이 초대 교회를 연상케 했다.
 두 군데의 신학교 공연을 보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언어는 달라도 우리는 하나다.”
 그 하나 됨을 찬양으로 증거가 되는 장로님들이 존경스러웠다.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까지 장로성가단의 해외 공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앞에도 적었듯, 여행하듯, 선교하러 가는 것으로 착각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들만의 잔치’라고 생각했다. 가도 되고, 안 가도 그만인 행사라고 말이다.
 이번 찬양 선교 연주에서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그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싶었다. 동행한 권사님 몇 분도 나와 똑같은 말을 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둘째 날 저녁에, 우연히 한 테이블에서 이철웅 지휘자님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휘하면서 나는 참 부족한데, 하나님이 나를 들어 쓰시는 걸 너무 많이 경험했어요. 장로성가단에 오게 된 계기도 그렇고요. 곡 선정이라든가 여러 행사를 진행하면서 받는 은혜 속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저는 앞으로 평양 무대에서 주님을 찬양할 기회가 오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해외 찬양을 나갔을 때 만난 ‘천국으로 간 소녀’의 경험을 들려주셨다.
“저는 우리 장로님들의 나이가 많은 게 전혀 문제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연세에도 이토록 열정적으로 찬양으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너무 귀합니다.”
 라는 말씀을 들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젊은 장로님들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전혀 상반된 의견이었다.
 


 어느 집단이든 좌장의 의식에 따라 색깔이 바뀐다. 한국장로 성가단의 지휘자님과 짧은 대화 속에서 ‘변화’의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또한, 장로님들의 깊은 배려심과 이해가 어우러져 더욱 성장 발전하는 성가대가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예정된 공연이 모두 끝난 뒤, ‘하롱베이’로의 여행은 몽환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바다 위에 우뚝 선 3000여 개의 섬은 어디를 보나 비경이었다. 세계의 많은 관광객이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잔잔한 바다 위의 배 위에서 비경을 바라보던 일행 모두가 한목소리로 찬양을 드릴 때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주님의 작품이 얼마나 위대하고 섬세한 지, 절로 찬양이 나왔다.
 해외 선교 연주 여행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지금까지 선교 여행에서는 경험치 못한 ‘친교의 밤’ 행사가 펼쳐졌다. 이번 해외 공연을 위해 자비로 답사까지 불사하고 세심하게 준비한 김순환 장로님의 사회로 진행된 예배는 ‘한국장로성가단의 존재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 이었다. 강판규 장로님이 ‘우리는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가?’란 메시지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시골 출신 목사님의 예화가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1부 예배가 끝난 후, 2부 친교의 시간은 단장이신 원영철 장로님이 문을 열었다. 단장님은 수고하신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 노고를 위로했다. 친교의 시간 사회를 맡은 오정근 장로는, 각기 애쓴 단원들을 무대 앞으로 끌어내기 위해, 퀴즈 타임을 갖는 등, 분위기를 흥미롭게 이끌었다.
 장로성가단의 선후배님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기도 하고, 그간 애쓴 노고를 진심으로 칭찬해 주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훈훈했다. 친교의 시간을 통해, 천국이 죽어서만 가는 곳이 아닌, 지금 바로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이번 해외 찬양 선교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와 물질로 애쓴 분들이 많은 줄 알고 있다. 그 열매를 본 당사자로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한국장로성가단은 변화의 물결 속에서 많은 일을 해나갈 것이라 믿는다. 더욱더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 가 찬양의 씨앗을 많이 뿌려주었으면 하는 소망과 함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