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여행-4. 풍경과 사람 그리고 흥에 취하다
풍류여행-4. 풍경과 사람 그리고 흥에 취하다
  • 권오만
  • 승인 2019.03.21 2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오대산 월정사-공포불의 상징적 의미와 종교적 친연성

 

글/사진 권오만 교수 (경동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 )=

월정사 일주문의 공포구조를 보면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아주 특별한 건축기술을 감상했는데 눈치가 조금 더 빠르거나 예민한 여행자들은 이렇듯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물리적 디자인 능력을 뛰어 넘는 훨씬 더 차원이 높은 설계 의도를 하나 더 알아챌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형상적 디자인을 통해서 불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많이 들어보고 한번쯤은 따라서 읊조려 보았을 반야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의 한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무심결에 떠 올려 독송하게 만드는 참으로 묘한 압박과 은근한 강요의 기술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권오만 경동대학교 교수
권오만 교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은 ‘없는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 즉 ‘있고 없음이 다르지 않다,’는 불교 경전의 교리를 통해서 일평생 무겁게 짊어져온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 같은 속세의 욕심을 티끌처럼 가볍게 내려놓으라는 종교 철학적 가르침이요, 일주문 공포불 역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특별한 장치를 통해서 종교적 교리를 떠 올리게 하는 다분히 의도적인 공간적 디자인이니 종교적 교리와 공포불의 상징적 친연성은 인간의 종교 철학과 공간에 대한 특별한 용도를 규정하는 디자인적 기술의 아주 멋스런 어울림 아닐까요.

시각의 폭을 넓혀서 우리 공간 디자인의 형상적, 철학적 멋짐을 잠시 뒤로하고 20세기 초 네덜란드 출신의 그래픽 아티스트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의 작품을 감상해 볼 텐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월정사 일주문에서 보았던 공포불의 잔영을 우리와는 수만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공간적인 교류가 쉽지 않았을 그의 작품을 통해서 아주 우연하게도 디자인적 창의성과 공통적 교감을 다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Sky and Water I(1938 Woodcut. 439mm x 435mm)자료:https://www.mcescher.com
그림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Sky and Water I(1938 Woodcut. 439mm x 435mm)자료:https://www.mcescher.com

M.C. 에셔의 대표작중 하나인 Sky and Water I 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보면 깃털까지 자세히 묘사된 하늘을 나는 한 마리의 기러기가 한 층 내려오면서 두 마리로, 그다음 층에서는 세 마리로, 계속 층을 내려오면서 한 마리씩 늘어남과 동시에 기러기에 대한 표현은 점점 단순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넓었던 기러기들 사이의 공간 간격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모르는 결에 기러기와 기러기 사이의 빈 공간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순한 형상이 하나 둘씩 형성되고 조금씩 구체화되어 나타나기를 반복하다가 가장 아래층으로 내려와서는 하늘을 날던 기러기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기러기와 기러기 사이의 빈 공간은 어둠으로 표현된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로 변해버리는 초현실주의적 작품 속에서 우리는 월정사 일주문의 공포 구조와 서로 닮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한 일주문 공포의 건축디자인의 형상적, 철학적 정수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 어떤 경로를 통해 현대 세계미술의 한 장르를 일으키는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측은 과연 지나친 억측일까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아귀다툼 속에서 시끄럽기만 했던 세상과의 속연을 잠시 끊고 이 공간에서만큼은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나 자신만의 깊은 울림에 집중해보고 일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정진하겠다는 다짐으로 일주문을 넘어서면 세상에 둘도 없이 거만했던 뻣뻣한 뒷목이 저절로 숙여질 만큼 마음이 경건해지게 만드는 울울창창 전나무 숲길을 만나게 됩니다.

코끝마저 찡하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늘씬하게 뻗은 전나무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밀려 하나 둘 자기 몫을 내어주다 결국은 수명을 다한 고사목을 활용해서 만든 조각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덤입니다.

그림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고사목 작품 1
그림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고사목 작품 1

빛 한 톨 내리쬘 수 없는 절대적 어둠과 오랜 은둔의 외로움을 어미로부터 물려받은 기억조차 가물거린 작은 신념 하나로 이겨내고 마침내 연녹색의 여린 잎을 하늘로 향해 뻗어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마지막까지 온전히 뚫어 내지 못했던 하나인 덩이처럼 단단한 동토의 땅 거죽을 호기심어린 옅은 미소로 기어이 열어젖히고 일어섰던 뜨거운 생명의 움틈은 하늘 끝까지 닿고 싶었던 이승의 욕심을 내려놓은 채 어느새 그 생을 다하고 지난했던 일생의 마지막 증거라도 되는 양 옹이 박힌 고된 몸뚱이를 세상 그 누구도 끊어 낼 수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이정표마냥 단단히 세워놓은 고사목들이 이미 정해진 억겁의 윤회의 한 장면처럼 다시 땅속으로 돌아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어느 목공의 굳은 살 박힌 마디마디 정성스런 손길을 빌려 숲속의 작품이라는 아이러니로 되살아나 다시금 새로운 생명을 이어 나가려는 그 뜻은 종교적 윤회의 실증적 입증인 듯합니다.

그림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고사목 작품2
그림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고사목 작품2

삶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답을 동시에 던져준 애잔한 월정사 전나무 숲길의 고사목 작품은 에셔의 또 다른 작품 Reptiles(1943)과 묘하게 연결되는 참으로 특별한 우연이 있습니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육각형을 이용한 반복적인 쪽 맞추기, 타일링이라고도 함)이라는 기법을 사용한 에셔의 작품 Reptiles(1943)을 보면 약간의 단순한 선과 옅은 명암을 사용하여 반복적으로 스케치된 정육각형의 쪽에는 명암을 달리하며 정확히 120도 각도의 회전을 하며 균형을 이룬 파충류가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며 그려져 있고 평면의 화판 아래쪽에서는 운 좋게도 생명을 얻어 바깥세상으로 기어 나왔던 근육질 악어 형상의 파충류가 아주 단출한 상징적 생의 순환을 거쳐 다시 평면의 종이 화판으로 되돌아가는 파충류의 테셀레이션을 통해 불교적 교리의 윤회를 암시한 M.C. 에셔의 작품과의 우연이 너무나도 경이롭습니다.

그림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Reptiles(1943 Lithograph. 385mm x 334mm)자료:https://www.mcescher.com
그림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 Reptiles(1943 Lithograph. 385mm x 334mm)자료:https://www.mcescher.com


/다음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