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페이퍼 로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페이퍼 로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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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2.26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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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페이퍼의 신문 전면 광고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신문을 넘기다 전면광고의 제목에 눈길이 꽂혔다. 저 회사 이름이 언제 저렇게 바뀌었지! 그 전면광고는 심심찮게 지면에 등장했다.

"Paper Road! 전주페이퍼가 종이의 세계화를 개척하고 있습니다."

전주페이퍼로 이름을 바꾼 전주제지가 지금 호주,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 종이를 수출하고 있다는 광고였다.

북면이 나오는 토요일 자를 넘기는데 또다시 이 전면광고가 실렸다. 그때, 쿵 하는 느낌이 왔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 서가를 스캔했다. 문명교류사 관련 책들을 한데 모아 두었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책들은 밑줄들과 낙서들로 지저분했다. 오래 묵은 밑줄과 낙서를 조금 읽다 보니 ‘페이퍼 로드’의 풍경들이 가상 현실(VR)로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페이퍼 로드'는 실크 로드(Silk Road)에서 파생했다. 동방에서 생산된 비단이 낙타와 말에 실려 사막과 산맥을 넘어 서방으로 이동한 길이 실크 로드다. 대만계 일본 역사학자 진순신은 '페이퍼 로드'라는 명저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어느 방송국에서 국수의 생애를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누들 로드'를 만들었고, 다시 '치킨 로드'까지 나왔다.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라지만 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을까. 비단은 입지 않고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종이는 문명의 시작과 끝이라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채륜 초상화

종이 발명과 관련된 공인된 역사적 사실을 얘기해 본다. 종이는 서기 105년 중국 후한(後漢)의 환관 채륜(蔡倫)이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 공로를 인정해 채륜을 귀족인 용정후(龍亭候)에 봉하고 영지를 하사했다. 이후 채륜은 채후로, 그 종이를 채후지라 불렸다.

중국이 서양에 전해준 발명품이 종이와 화약과 나침반이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각 문명권은 점토판, 파피루스, 양피지를 필사 재료로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가볍지만 잘 부서졌고, 양피지는 잘 쓰였지만 무겁고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인간은 편리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가지려 끝없이 노력해 왔다. 역사는 채륜을 종이 발명가로 기록하고 있지만 채륜이 어느 날 갑자기 맨땅에서 종이를 발명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종이 비슷한 것이 있었고, 이름 없는 이들이 보다 편리한 필사 재료를 만들기 위해 피땀을 쏟았다.

그 증거가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이전, 이미 여러 문헌에 종이 '지'(紙)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채륜은 이런 축적 위에서 결정적인 한 수로 종이를 개발한 것이다. 가볍고 쓰기 편한 종이가 발명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중국 문명은 차원이 다른 깊이를 더해가며 심화되었다. '논어' '천자문' 같은 고전이 종이에 필사되어 전파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현대판 베스트셀러를 뜻하는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의 어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낙양지가고'(洛陽紙價高)는 위·촉·오 3국을 통일한 진(晉·265~315)의 역사서 진서(晉書)에 나온다. 낙양은 현재의 시안(西安). 진나라 시인 좌사가 쓴 삼도부(三都賦)가 명문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낙양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삼도부를 베끼려 종이를 사들이는 바람에 종잇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는 당시 종이가 대량 생산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돈만 있으면 누구나 구할 수 있었다는 방증이다.

실크로드 지도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중국 시안은 실크로드 대상의 출발점이다. 사진은 시안에 있는 실크로드 기념탑. 조성관 작가 제공

세계사를 바꾼 751년 탈라스 전투

동방의 종이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서방에 전해졌을까. 동양의 페이퍼가 서양으로 떠난 기나긴 여정, Paper Road! 이미 동서양의 역사가들이 이 매혹적인 주제를 파고들어 결론을 내렸다.

751년 중앙아시아 탈라스(Talas) 전투. 탈라스강이 흐르는 계곡에서 전개되었다. 왜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나. 8세기 중반의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세계정세를 잠깐 조망해본다. 중국 대륙에는 통일 제국 당(唐·618~907)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으로 주변국에 위세를 떨치는 중이었다.

실크 로드가 지나는 서북쪽 중앙아시아는 소그드인 같은 유목민 부족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당의 영토 밖에 위치했지만 세계 최강 당의 영향권 속에 있었다. 당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西域)과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한국·일본과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 당은 개방적인 대외정책, 종교의 자유, 인사 탕평책 등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능력 있는 돌궐인, 고구려인, 일본인 등이 중앙정부의 요직에 진출했다.

당 제국이 시작된 4년 뒤 서역. 이슬람교를 창건한 마호메트가 갖은 박해를 피해 아라비아반도 메디나로 옮겨가(헤지라) 그곳을 포교 거점으로 삼았다. 622년. 헤지라력(曆) 원년이다. 이후 이슬람교는 무서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정교일치를 표방하는 이슬람 집단은 이슬람교가 침투한 지역은 교주(칼리프)가 다스렸다.

이슬람 세력은 이란의 사산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슬람교는 이란화(化)하면서 비로소 사막 종교에서 벗어나 세계 종교의 틀을 갖춘다. 이후 이슬람은 전방위로 세력을 뻗쳐 나간다. 아바스 왕조에 이르러 이슬람제국은 본격적으로 실크 로드의 거점인 중앙아시아를 탐했다. 이슬람의 동진(東進)! 실크 로드를 지배할 수만 있다면···. 중앙아시아에는 불교, 기독교 일파, 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가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751년의 탈라스 전투 개념도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751년 여름에 벌어진 탈라스 전투는 실크로드 지배권을 놓고 당이 동진하는 이슬람제국과 벌인 한판 승부였다. 그때 탈라스에 출병한 당군의 총사령관이 고구려 출신 고선지(高仙芝). 당군은 5일 동안 치러진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군에 대패했고, 고선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세계 최강 당군은 왜 탈라스 원정에서 크게 졌을까. 복잡한 국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중앙아시아 원정(遠征)에 전력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는 점 외에도 당군과 연합군을 구성했던 유목민 부족의 배신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슬람군은 다수의 장교·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그 포로 중에 종이 제조 기술자가 있었다. 제지공이 사마르칸트(현 우즈베키스탄)까지 끌려가 그곳에서 종이기술을 전수했다. 탈라스 전투 얼마 뒤에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이슬람 경전 코란이 종이에 필사되어 퍼져나갔다.

탈라스 전투는 중국 역사서에 어떻게 기술되고 있을까. 송나라 때 쓰여진 신당서(新唐書)에는 '고선지가 대식(大食, 아랍)과 탈라스 성에서 싸워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단출하다. 왜 그럴까. 일본의 역사가 진순신(陳舜臣)은 '페이퍼 로드'에서 "당의 영토 밖에서 일어난 전투로 실제로 땅을 빼앗긴 게 없어 심각하게 판단하지 않은 결과"라고 해석한다. 설득력이 높다.

탈라스 전투는 인류 역사상 주목할 만한 문명 충돌이다. 그리스문명과 페르시아문명이 격돌한 기원전 5세기의 살라미스 해전과 흡사하다. 이슬람 문명과 중국 문명의 만남! 새뮤얼 헌팅턴이 냉전 이후의 세계 질서의 흐름을 예측한 '문명충돌론'이 1200년 전에 벌어진 것이다.

사마르칸트에서 생산된 종이는 실크로드를 따라 이슬람 제국에 전파되었고, 종이 제지술은 오래지 않아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이로써 세계사의 무게 중심이 서서히 동양에서 서양으로 기울 게 된다.

탈라스 패배 이후 당을 비롯한 역대 중국 왕조들은 중앙아시아 지역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실크 로드가 막히면서 중앙아시아는 중국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그사이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전역을 장악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化)가 완성된 것이다. 751년 탈라스 전투는 이슬람교 세계화의 변곡점이 되었다

이미 세계의 역사가들이 탈라스 전투가 치러진 역사적 현장을 답사했다. 그곳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잠불주(州) 타라즈 남쪽이다. 카자흐스탄은 남쪽으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국경과 가까운 도시가 타라즈. 또한 키르기스스탄 북방 국경에 인접한 도시가 탈라스다.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유라시아 대륙의 지도를 보자. 시베리아와 중국 사이의 거대한 땅덩어리가 카자흐스탄이다. 영토 면적으로 세계 9위. 주변의 우즈베키스탄, 타즈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을 포함한 중앙아시아는 실로 광대하다. 지구 전체 육지면적의 7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하면 실감이 날 것이다.

중국 공산당에 커다란 골칫거리가 독립을 주장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다. 실크 로드가 관통하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 국경 안쪽에 있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중앙아시아 영향권이다. 이 자치구 주민들은 모두 이슬람교를 믿는다. 중국 내 소수민족 대부분은 중국의 압제(壓制)에 찍소리도 못하지만 이 자치구는 다르다. 중국 공산당에 목숨을 건 폭력 투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신장 위구르'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마다 751년 탈라스 전투의 역사적 의미가 둔중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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