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王)을 품지 못한 안산(鞍山)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다.
왕(王)을 품지 못한 안산(鞍山)에서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다.
  • 박주영
  • 승인 2021.04.13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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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이로문 법학박사(민주정책개발원장) 

비상시에 횃불과 연기로 통신을 하던 때가 있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봉수대(烽燧臺)가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서울 서대문구 안산(鞍山)이다. 그리 높지 않은 안산의 정상에 올라서면 왜 이곳에 봉수대를 두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발아래 서울이 펼쳐져 있어 서울의 도심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서울을 가로질러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노라면 그렇지 않아도 빠른 심장이 더욱더 심하게 요동친다. 지금이야 높은 빌딩 숲이 가로막고 있어 시야의 제약이 많지만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 안산만큼 멀리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 바로 봉수대가 있었던 이유이다.

이로문 법학박사
이로문 법학박사

사실 안산은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산이다. 조선을 개국하고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에 한양의 어디에 궁궐을 지을 것인지 그 터를 물색할 때에 인왕산 일대를 비롯해 안산 아래 신촌 주변도 궁궐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다고 한다. 결국에는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인왕산 아래 경복궁이 들어섰지만 그만큼 안산 터도 명당이라 할 수 있다. 인왕산이 왕을 품게 되자 안산은 왕을 품는 대신 인왕산 옆에서 왕을 지키는 산으로 남았다. 안산 정상에 봉수대를 세우고 안산 허리에 봉원사를 지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안산은 지금도 인왕산이 부러운 듯, 왕을 그리며 경복궁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안산을 오르거나 또는 내려올 때 봉원사(奉元寺)를 잠시 둘러보는 것은 필수다. 안산에 오른다며 봉원사에 들르지 않는 것은 안산을 반밖에 오르지 않은 것과 같다. 마포구민들은 거의 대부분 봉원사 경내를 통과해 안산에 오른다. 봉원사는 경내가 그리 넓지는 않지만 유서가 매우 깊은 곳이다. 봉원사의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연세대 자리에 창건되었다가 조선시대 21대 영조 때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서대문구민이나 마포구민들은 봉원사보다는 “새절”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아마도 조선시대 이기는 하지만 “새로 지은 절”이라고 하여 이렇게 부르지 않았을까? 봉원사 대웅전을 지나 오르막길을 좀 오르다 보면 안산 초입 바로 정면에 만월전(滿月展)이란 불당이 있다. 봉원사 창건 당시만 해도 만월전에서 한강 속에 가득 찬 달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안산 입구 만월전 앞에 서면 항상 고민이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자락길을 걸어서 안산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며 한가하게 정상 밑까지 갈 것인지 아니면 조금은 가파르지만 계단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올라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락길은 약 7 ㎞ 정도로 산책하기 좋게 만들어 놓아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돌다보면 정상 밑에 다다르고 그곳에 100m 정도 가파른 바위를 따라 오르면 정상 봉수대에 다다른다. 계단으로 오르면 약 300m 정도만 거친 숨을 몰아쉬면 정상 밑에 이른다. 계단부터 정상까지 연속해서 오르면 짧은 시간 내에 격한 운동을 하는 효과가 있다. 계단을 통하든 자락길을 통하든 결국에는 같은 곳에서 만난다. 

안산의 정상인 봉수대

어느 길로 가든 정상에 오르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가 펼쳐진다. 서울의 빼곡한 빌딩 숲 사이에는 참으로 많은 역사가 숨겨져 있다. 안산 정상에 오르면 내가 역사의 한 가운데 숨 쉬고 있음을 느낀다. 한눈에 들어오는 경복궁을 바라보며 조선왕조의 역사를 생각하고, 구 서대문형무소 터와 독립문을 굽어보며 일제시대의 가슴 아픈 역사를 돌이켜 보며, 새삼 작아 보이는 여의도와 청와대를 바라보며 현대 정치의 굴곡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서울 시내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과연 있을까? 생각보다 가까워 보이는 남산과 한강을 따라 줄지어선 빌딩을 보면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인 서울을 느낄 수 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서울을 병풍처럼 둘러싼 인왕산 성벽 길과 북한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처럼 안산은 자연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저 멀리 보이는, 안산의 정상

안산은 300m도 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높은 지대부터 등산을 시작하기 때문에 사실 산 같은 느낌 보다는 동네 뒷산 같은 편한 느낌을 주는 산이다. 안산에 오르는 것은 등산 보다는 산책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 수도 있다. 가끔 지친 일상을 벗어나 숲의 기운을 느끼고 싶은데 높은 산이 부담스럽다면 안산에 올라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안산은 말한다. “굳이 정상에 오르려 하지 말라. 걷다 보면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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