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여행-7. 풍경과 사람 그리고 흥에 취하다
풍류여행-7. 풍경과 사람 그리고 흥에 취하다
  • 권오만
  • 승인 2019.04.14 12: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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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월정사-공간을 통제하는 기법(루하진입법)

글/사진 권오만 교수 (경동대학교 건축디자인학과)=  누하진입법은 이러한 심리적, 시각적 장치 이외에 시대상을 담은 다른 차원의 의도, 즉 조선시대 유교를 국가 통치의 기반이 되는 사상으로 중요시하고 반대로 불교는 구 왕정 세력과의 결탁으로 인한 부당한 정치개입과 폐해세력 척결의 이유로 억압함에 따라 최하층의 신분으로 전락한 사회적 입지에 대한 고단함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권오만 교수
권오만 교수

치열한 경쟁을 하였던 삼국시대에 왕족들을 중심으로 번성하였기에 사찰의 입지 역시 왕경중심의 평지형 사찰이 주된 공간적 분포였지만 통일신라, 고려 때까지 번성을 거듭하다 조선왕조의 개국으로 나라를 통치할 새로운 사상이 필요함에 따라 유교에 밀려 사회적인 입지를 잃고 승려들의 신분은 사회 최하층 계급으로 내려앉았으며 사찰의 입지도 이들의 신분하락과 함께 점차 왕경중심에서 산경부로 세력권이 밀려났다.

그러다 보니 힘깨나 쓰는 양반네들이 경치 좋은 곳으로 유람을 다니며 그들의 편의를 조달하기 위해 산속에 위치한 사찰에 막무가내로 말을 타고 들어와 승려들을 부려먹고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을 테고 그렇게 고요한 수도도량을 흔들어 놓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요?

이러한 사실은 화가 정선이 1711년에 김창흡의 여섯 번째 금강산 유람에 동행하며 그렸던 작품 백천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외금강 유점사 아래에 위치한 백천교는 가마를 타고 금강산에 유람 온 양반들이 이곳에서 말이나 나귀로 갈아타는 환승지점이었는데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흰색 고깔을 쓴 승려들이 가마를 내려놓고 쉬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는데 당시 승려들이 양반들의 유람활동에 쉽게 동원되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그들의 고단함을 대변해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림 백천교(정선, 1711) 자료: http://psh.krpia.co.kr
그림 백천교(정선, 1711) 자료: http://psh.krpia.co.kr

 

그 시기에 지역관리들의 물질적 도움과 환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신분이 높은 일부 계층의 양반들은 많은 식솔들과 동행하여 풍광이 좋은 유명 경승지를 유람하여 다녔고 이를 유산(遊山)이라 하여 특별한 경험으로 자랑하기도 하였는데 조선전기의 사대부들의 산행은 대체로 도보로 이동을 하였으나 16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유산활동에는 그들의 발을 대신해줄 가마와 이를 매고 다닐 인력으로 산중 사찰 곳곳에서 수행을 하는 승려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상류계층이었던 양반들은 가마(輿)와 말을 주요 이동 수단으로 활용하였는데 그중 말은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아주 유용한 이동수단이자 현대의 승용차와 같이 편리한 이용과 더불어 자신의 신분과 권력을 과시하고 말 등과 같은 높은 입지에서 내려다보는 심리적 우월감에 도취될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양반들 중 일부 계층의 양반집 자제들이 신성한 수도의 도량인 사찰에 말을 타고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며 안하무인격의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닐 때 안타깝게도 이를 통제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에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양반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종교적 공간에 대한 엄숙함을 지켜낼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 끝에 생각해낸 아주 기발한 방법이 바로 누하진입법이었습니다.

사찰 입구에 일종의 하마비와 같은 기능을 부여하여 주요 이동 통로에 산문과 누각을 배치하고 반드시 이를 통과해야만 본당의 공간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공간적인 통제를 하였기에 낮은 문 높이로 공간을 막아선 누각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와 걸어 들어오게끔 하였던 장치가 바로 누하진입법이라는 탁월한 방법인 것입니다.

궁궐이나 관청을 수시로 드나들 수 있던 당시의 신분 높은 양반들은 급할 때는 집안에서 말을 타고 나들이 할 때도 있어 말을 탄 채로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솟을대문-양반가 권위의 상징으로 사대부집의 경우 양옆의 행랑보다 지붕을 높게 올려서 만든 대문으로, 일부의 경우에는 굳이 말을 타고 드나들지 않아도 집의 격을 높이기 위한 과시용으로 만들기도 하였다-을 만들었는데 지붕이 낮을 경우 말을 탄 채로 출입하기 어려워 부득이 밖에서 말을 내려야 하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말을 타고 사찰경내로 들어옴에 따라 발생하는 소란스럽고 부당한 출입을 자연스럽게 막아 내고자 말에서 내려 걷지 않으면 머리를 부딪칠 수 있으니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납작 엎드려 볼썽사납게 지나가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게끔 하는 특별한 공간 접근방법이 바로 누하진입법입니다.

 

그림 관인원행(김홍도_1795)자료: http://psh.krpia.co.kr
그림 관인원행(김홍도_1795)자료: http://psh.krpia.co.kr

 

지체 높은 양반들이 이동수단인 말에서 내려 걷도록 엄숙하게 예의를 지켜야 하는 대표적인 장소인 우리의 법궁인 경복궁이나 종묘, 능원, 사당 등에는 입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즉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라는 글을 적어 놓은 하마비(下馬碑)와 말에서 내리는 것을 돕는 디딤돌을 설치하여 글을 읽을 줄 아는 양반이라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고 출입을 하겠지만 아무리 글을 많이 읽었어도 수양이 덜된 양반자제들이 자신의 권력을 뽐내듯 말을 타고 들어와서 엄숙하고 경건한 수도도량인 불당 경내를 휘젓고 돌아다닐 때 감히 나서서 제어할 수 없는 어려움을 종교공간인 사찰에서는 누하진입법이라는 기발한 지혜를 통해서 해결한 것입니다. 바로 불교의 종교적 공간 설계자의 탁월한 통제 기법입니다.

그나저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글을 많이 읽는다고 수양이 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다음에 계속

 

그림 하마비
그림 하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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